동대구
차명수 Film2006관련링크
본문
페이지 정보
- 설명
댓글목록
장지나c님의 댓글
장지나c
무심한 듯, 사람이 거의 없어 어쩜 허전한 풍경이지만 빈자리가 있어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은 듯 보이는 구도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마주보듯 조금 비껴서 위치한 두 개의 W모양 구조물이 지금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친구와 절 연상시켜 그때의 이야기를 붙여 놓습니다.
*
랭귀지 코스에서 만난 바르셀로나 출신의 그녀와 서울에서 온 난, 정치토론 시간에 이런 저런 욕을 하다 의기투합하여 단짝이 되었다. 그녀는 정열의 나라에서 온 여인답게 쉴 새 없이 연앨 했었고, 또 언제나 내게 남자친구와의 이야길 했는데 그때마다 난 응응 맞장구도 치고 부러워도 했으며 이런~하고 흥분도 해가며 그녀의 이야길 들었다. 랭귀지 코스가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우린 다른 학교로 나뉘었고, 각자 수업과 과제에 치어 가끔 전화하며 소식을 전할 뿐 전처럼 자주 만나진 못하게 되었다.
어느 주말, 우린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 약속을 했었다. 그때 난 한국에서의 전공이 아닌 전혀 새로운 전공을 택했기에 기초도 없거니와 기계치이기까지 해서 실기시간만 되면 긴장상태였고, 그보다 더 힘든 건 전공과목을 담당한 뉴욕 토박이 선생님의 유난히 빠른 말투에 수업을 알아먹기도, 페이퍼 쓰기도 넘 힘들어서 내가 이 나라에 무슨 영화를 보자고 왔을까 궁시렁 거리기도 했었다. 그래선지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냅킨을 길게 세로로 접어놓고 막 글씨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알파벳을 a, b, c...하고 써내려갔는데, A부터 Z까지 써 놓고 보니 옆으로 공백이 남아서 무의식적으로 낙서처럼 일관성 없는 단어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a - acceptable
b - basquiat
c - clementine
d - desperately
그렇게 m까지 왔을 때, ‘메모리’라고 할까, ‘미스틱’이라고 할까, ‘매스커레이드’라고 할까... 연하게 써놓고 잠깐 망설였는데, 테이블을 톡톡치는 소리가 들려 고갤 들어보니 친구였다. 그녀를 보곤 얼른 m 옆에 진하게 한자 한자 힘주어 meet을 썼더니 냅킨을 드려다 보던 친구가 피식 웃으며 ‘넌 정말 어쩔 수 없는 로맨티스트야’ 하고 말해서 난 헤헤 웃으며 냅킨을 곱게 접어 책속에 끼워 넣었다. 학교수업은 어떠냐고 묻기에 버겁네...하며 또 헤헤 웃었는데 대답하는 소리가 힘이 없다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날 보던 그녀가 어서 밥부터 시키자 하더니 주문을 마치자 말했다. ‘오늘은 내가 쏜다!’
밥을 먹는 동안 우린, 당시에 유행하던 음악 얘기에서 영화, 책, 찰리 로즈 쇼, 예전 클래스 친구의 연애사까지 여러 가지 주제로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또 그 느낌이 왠지 불안해서... 곰곰이 우리의 대화를 처음부터 되짚어 보았고 이유를 알게 되자 난 친구를 쳐다만 볼 뿐 조잘거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친구는 내 표정변화를 알아차렸는지 이야길 멈추고 날 쳐다만 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피식 웃더니 ‘응, 헤어졌어.’라 했고 난 가만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얼마간의 침묵이 우리 사이에 있었는데, 수다쟁이 그녀가 이번 이별엔 거기에 대해 어떤 말도 못 할 만큼 좋아했구나 싶어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예전의 장난 같은 만남이 아니라며 ‘이번엔 운명이야’ 기쁜 목소리로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난 갑작스런 이별이었구나... 짐작만 할 뿐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을밖에.
다시 이야길 시작한 건 그녀였다. 아까 낙서하던 냅킨을 꺼내보라 하더니 n 옆에 nobeing 이라 써 넣곤 ‘다음은 뭐?’하며 o를 볼펜 끝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난 그녀가 써놓은 nobeing이란 단어가 주는 여운이 써서 그것만 쳐다보느라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당황해선, 말까지 더듬으며 ‘오렌지’도 아닌 ‘오, 오, 오, 오펙(OPEC)?’ 하고 말았다. 그리곤 웬 석유수출기구? 하고 뜬금없이 떠오른 그 단어에 쑥스러워져 이힛. 헤헤... 하고 웃어버렸는데 바보스러웠을 내 표정변화가 재밌었던지 그날 우리가 만난 후 처음으로 그녀도 푸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우린 디저트를 먹으며 사이좋게 남은 스펠에 단어를 채워갔다. w 차례가 되었을 때, 내가 we! wish! 하고 말하자 그녀는 whatever! whenever! 하고 외쳤다. 그때 우리의 상황엔 전부 어울리는 것 같아 w에는 특권을 줘서 다 포함시키자 했었고, x까지 채우곤 냅킨을 소리 나게 탁탁 접어 다 마신 와인 글래스 옆에 두었다. 잠시 후, 웨이터는 그릇을 치우러 와선 그 냅킨까지 가져갔고, 당연하지만 그건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린 왠지 그 결말을 뿌듯하게 느꼈던 것 같은데... 어쩜 그 단어들을 써넣을 때마다 눈으로 보이니 인정하고, 다짐하면서 우리가 가졌던 고민들이 해결될 기미를 찾은 것처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역에서 우린 반대편 선로에 서게 되었다. 나는 다운타운으로, 그녀는 업타운으로. 괜찮다고, 또 연애함 되지! 라고 씩씩하게 말했지만 그 맘이 어쩔까 싶어 난 건너편의 그녀를 내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지하철을 기다리며 바닥만 바라보던 그녀는 자길 쳐다보던 날 느꼈는지 고갤 들었고,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었다. 그런 친구가 새삼 짠하기도 하고 예뻐 보여 내 사랑을 전해야지 맘먹곤 티브이에서 나오는 열여섯 살 사춘기 여자애처럼 두 팔 머리 위로 올려 하트를 만들곤 춤추듯 왔다리 갔다리 했었다. 그런 날 보더니 또 깔깔 웃으며 ‘나도!’ 라고 건너편의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쳐줬었다. 잠시 후, 그녀가 탈 트레인이 도착했고 그날 우린, 유난하다 싶을 만큼 서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었다. 먼저 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돌아오는 지하철안. 내내 떨쳐지지 않던 짠함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우린 서로가 있음을 더 기쁘고 감사하다 느꼈던 거 같다. 다시 얼마 후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에 그녀는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고 내게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었다.

회원가입
로그인

543
